unership faces death
생각이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
영감이 사라졌다. 사라졌었다. 그리고 불현듯 찾아왔다. 술 취한 그대와 함께. 와인이 나를, 진짜 나를 불러온 걸까, 점심 때 훌쩍이던 영화가, 사실 훌쩍이진 않고 뻔한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며 평온하고 활기찬 봄 날의 혼자를 위로할 겸 시작한 그게 그랬을까.
생각이 많은 자가 삶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하여.
건방질 수 있다. 어쩌다 나는 ~할 수 있다는 화법을 구사하게 된 걸까. 이게 바로 의식의 흐름일까.
꿈이 나를 이끌며 내게 다가온 링월드 시리즈를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한없이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리라.
꿈에서 본 그것은 정말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직까진 말이다. 예지몽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이 자신의 꿈에서 본, 내 꿈에서 본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이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와인 한 잔 훌쩍이다 떠오른 영감이, 나를 영감쟁이 우너배로 이끌어음을. 이게 출발점이다.
의식의 흐름이 때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사람이, 생각이 많아 하루의 프레임을 60헤르츠 이상으로 바라보고, 직면하고 있는 인간이 유일하게 위로할 수 있는 수단이, 내맡김이라는 걸 누군가는 알 수 있을 듯 싶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술이 조금씩 깨고 있는 지금의 내가 자신감을 놓아주고 있다. 원래 자신감 하나만 믿고 존버해 온 인생인데 그 느슨함이 더욱 느슨해지는 걸 느끼며 이처럼 글쓰는 아쉬워한다.
이 모든 시발점은, 그 시발의 것은 아마 모기가 들어오지 않는, 또는 못하는 이 봄날의 창문을 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려면 문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게 여러 해 전이다. 영어 공부하다 보니 문법이 중요한데, 한국어는 문법이 최악인데 대화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진 내가 아직까진 한국인인 이유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이 시원한 느낌과 그 봄의 춥지는 않고 따듯하지도 않지만 싫지 않은 그 기온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겠다. 그리고 모험이라는 단어가 나를.
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창문을 열어둔 채로 내 집을 그 기온으로, 또는 기운으로 채운다는 것, 그리고 닫힌 이 방문의 문이 주는 열려있지만 닫힌, 나만의 공간이라는 인식을 주는 그 아늑함. 창문으로 들어온 그 기분은 자유로움이었다.
내가 한국에선 아직 느끼지 못한. 외국에 가서야 느낀, 역마살이 낀 내 삶이 거기에 해답이 있을 거라 짐작했던 그곳에서. 힘을 뺀다는 건 무엇일까. 어째서 작가들은 술이라는 마법의 묘약에 자신의 인생을 맡긴 것일까?
그걸 알면 내가 그들이었겠지. 아니다. 나는 이미 그들이다. 마법의 묘약이 있었으니. 마법의 묘약으로 용기를 얻었으니. 빌어먹을 이 인생에서 마법의 묘약은 정말 묘약이었다. 어떠한 흐름이 내 의식에서 흐른다. 화면 앞에 앉기 좀전에 떠올랐던 그 영감은 온데간데 없고 억울하게도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화면에 따박따박 적혀 나가는 글자와 그 글자체의 율동이 인식되는 순간 나는 그 어느 순간에서 깨어난다.
무기력했던, 무기력한 내가 무언가를 행동하게 만든 동력이 사라지고 있다. 이 느낌은 희미해지는 게 아니다. 그냥 정신이 말똥말똥 돌아오고 있다는 의미다. 말똥말똥. 찰나의 과거가 그립다.
오늘도 누군가는 누군가가 애타게 찾고 있고 그들의 메시지는 내가 듣던 음악의 흥을 잠시 멈춘다. 정신이 다시 말똥말똥 돌아온다. 이게 내 시발. 내 시발점이길 바라며.
잘이든 못이든, 별로든 자기만족이 충만한 이러한 글을 다시는 못 쓰면 어쩌지. 술 없이 이처럼 망나니처럼 내 머릿속 실타래를 풀어내지 못하면 어쩌지. 빌어먹을 나라는 사람은 굉장히 진지하고 과묵한 인간인데 이처럼 평이한 문장들을 내 머릿속에서 해방시키지 못하면 어쩌지.
모험이 필요해.